<수필>누룽지

맹물에 잡혀 휘둘린다. 두리뭉실한 조각이 떠서 흔들린다. 시커먼 무쇠 바닥에 누워 갖은 시련 겪고, 깡말라서 탄력과 윤기가 없다. 구수한 향기는 풍기지도 않는다. 부드러움은 없고 딱딱하지만 내 눈을 붙잡는다. 물속에서 부풀어진 조각들은 산산이 방향도 없이 흩어지면서 뱅글뱅글 오르락내리락한다. 끓는 물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백 도가 넘는 수온에 조각이 찢어지거나 벗겨져도 그 수난을 겪으며 응축된 것을 남김없이 흩어낸다.

지닌 물기마저 햇볕과 실바람에 날려 버리고 참숯처럼 단단하다. 그게 펄펄 끓은 물에 내려앉을 여유도 없이 조각이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다. 열기에 성난 물은 소리를 내며 요동친다. 그 바람에 소용돌이 속에 중심을 잃고 온몸이 흐물흐물 힘을 잃었다. 그동안 단단한 고집마저 서서히 풀리면서 진기마저 분말처럼 풀렸다.

밥알은 벼 이삭이다. 그 벼가 반년 가까이 무논에서 따가운 해를 바라보고 초록빛 몸을 키웠다. 장마철 폭우와 광풍이 몰려온다. 그 벼는 부러지고 쓰러지면 그만이란 절망을 잊고, 서로 기대며 버틴다. 벼는 유연하게 비바람을 스쳐 지나게 했다.

무논에는 개구리밥, 개구리, 우렁이, 미꾸라지, 메뚜기, 백로, 뜸부기, 왜가리 함께 하거나, 가끔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벼포기 사이 헤집고 다닌 올챙이, 미꾸라지, 우렁이, 물방개 등이 있는 세상이다. 그 안에 상생과 경쟁의 작은 우주가 있다.

동쪽 하늘에 해가 뜨면서 벼 이삭이 짙은 녹색에 정결하게 머리를 내밀고 보란 듯이 패기만만하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다. 참새가 우짖는다. ‘아직 쭉정이야! 먹을 게 없어.’ 부리 입질을 막아 보려고 까끌까끌한 껍질을 지녀도 콕콕 쪼아댄다. 이삭이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낮 종일 참새들이 쪼아대는데, 무서워서 가슴 졸이며 보냈다.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 한 조각 살짝 해를 숨긴 허공에 소쩍새 ‘솟적다’ 울음이 퍼진다. 그 소리에 귀 세우는 초록빛 들판, 그 울림이 벼알이 꽉꽉 찬 풍년가였다. 석양에 산 그림자 길게 누울 때 땅거미도 찾아든다. 참새도 어둠을 피해 보금자리로 들어간다. 한숨을 돌리고 얼른 고개를 숙이는 날을 속절없이 기다린다. 바람도 잠이든 까만 밤에 이슬이 이삭에 맺고 있다. 고즈넉한 밤이 되어 달라고 둥근달 곁에 별이 반짝인다.

먹고 남은 숭늉 아래 불어 터진 누룽지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니 옛날 숭늉 대접이 잊히지 않고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대접에 숭늉이 반절 이상 들어 있었다. 그 밥알 몇 알을 먹으려고 헛물을 마셨다. 퍼진 보리밥 알도 그냥 목구멍으로 물살에 휩쓸려 뱃속으로 직행했다. 지금도 물눌은밥을 편하게 먹고 있다. 조리가 단순하고, 구수하고, 담백하여 깔끔하다. 누룽지만 보면 그때 일 생각에 마음이 애처롭다.

다섯 살 나이인데도 징검다리처럼 어머니와 생활해온 일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하지만 어머니 얼굴은 뿌연 안개다. 늘 슬플 때나 기쁠 때 생각났다. 장년이 되어서 수소문 끝에 먼 친척으로부터 홀로 촬영된 흑백사진 한 장을 구했다. 처음 보는 순간 어안이벙벙했다. 하얀 무명 한복을 입고 손을 모아 잡고 단정히 서서 있었다. 그걸 보고 어머니라고 하기에 이상할 정도로 마음속에 어머니와 전혀 달랐다. 젊은 어머니는 달걀 같은 얼굴에 침착한 표정이었다. 코는 나와 닮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녀를 꽂고 머리를 매끈하게 했다. 왼손이 바른 손등을 가볍게 잡고, 왼손 중지에 백옥 반지, 약지에 가락지가 있었다. 그 손이 내 작은 손을 닮은 것 같다.

어머니 친구분이 집성촌에서 함께 지내면서 고생담을 전해줬다. 대가족 살림에 삼시 끼니 챙기는 일도 벅찼다고 했다. 손빨래까지 하면서 잠시 쉴 틈도 없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품앗이에 밭일까지 지긋지긋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한숨을 쉬신다. 시집살이 서러움 다 겪는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까지 태어나 고생만 하셨다. 육이오 전쟁 끝날 무렵에 외가댁에 있을 때 어머니가 주신 누룽지 맛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누룽지는 간식 중에서 위생적이고 건강에 좋은 음식이다. 무쇠솥은 기름칠로 반들반들 윤이 난다. 그 솥에 많은 식구 밥을 안쳐서 장작불에 밥이 될 때까지 마련된 찬을 준비한다. 다시 불을 살피며 밥이 뜸이 들게 기다린다. 숭늉과 아이 간식용 누룽지까지 어림하여 밥 한 그릇 이상 족하게 솥 바닥에 엉겨 붙게 했다. 부모에게는 눌은밥을 아이에게는 누룽지를 챙겨 놓는다. 어머니 애정이 녹아 있는 누룽지는 누르스름했다. 어머니가 잊지 않고 내놓는 사랑이다.

최병진 / 수필가

**최병진 수필가는 2021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아람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으로 '풀 향기 어머니', '맹물의 향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