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와 진달래가 산천을 수놓고 봄바람이 온 세상을 꽃향기로 뒤덮고 있었지만 남준과 명희를 비롯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폭압과 약탈에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남준 명희 같은 아이들도 학교에 가면 먼저 운동장에 모여 천왕을 찬양하는 인사과 노래,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외치는 구호 등을 외쳤고,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근처 산에 올라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는 일에 동원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꽹과리와 징을 공출당한 이후 남준과 명희의 부모들은 굿판을 벌이는 일은 아예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당골판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 점을 쳐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일을 했으며 간간이 굿을 해달라는 사람들을 찾아가 집안에서 개인굿을 해주며 연명하고 있었다. 

신동댁과 연기댁은 수수비로 부엌 바닥을 쓸거나, 아궁이에 불을 땔 때나, 측간에 갔다 올 때나, 어쨌든 아무 때나 일본 놈들이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씨우적거렸다. 물론 강병도나 박규환도 아내들의 중얼거림에 전염되었는지 수시로 같은 말을 했는데 남준과 명희는 절대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넘어갈 때 남준네나 명희네도 같은 고개를 넘어야 했음으로 곤궁한 봄을 지냈다. 그나마 두 집안 모두 아이들이 둘밖에 없어 입들이 많지 않은지라 그럭저럭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세월은 벌써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고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힘들었지만 아동들의 세상 속에서 그들의 놀이를 하며 커갔다. 

무장읍에서 명희의 동네인 황전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남준의 봉림마을을 지나야 했으므로 명희는 남준과 등하교를 같이 하는 때가 많았다. 

그날은 무슨 일이 있는지 남준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명희는 하교 길에 남준의 집에 가봤으나 남준의 여동생 남주만 있을 뿐 다른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남주는 부모님과 오빠가 만화리 복홍마을로 굿을 하러 갔다고 말했다. 명희는 남주와 놀아주기로 하고 마당에서 작은 돌을 주워 공기놀이를 했다. 

공기놀이가 지겨워질 때 쯤 집 토담 밖에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는 지 노랫소리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 명희는 남주 손을 잡고 싸리문을 나가 토담 뒤로 돌아가봤다. 

다들 같은 무장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으므로 얼굴이 익었고, 같은 학년 아이도 하나 보였다. 

“나도 저거 하고 싶어.”

명희는 고무줄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아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남주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옆에서 듣는 명희는 남주의 작은 음성이 아이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아이들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자기들끼리 깡충거리며 고무줄을 넘고 뛰는데 바빴다. 

“언니, 나도 저거 하고 싶다고.”

남주는 아예 마음을 숨기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의사 표명을 해댔다. 명희는 망설여졌다. 아이들이 끼게 해줄까. 당골래 딸이라고 무시하지 않을까. 

“우리도 끼워주면 안될까?”

명희는 용기를 내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봤다. 아이들은 명희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명희의 목소리가 작지는 않았다. 그들은 명희와 남주를 아예 무시했다. 명희의 볼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우리도 끼워줘.”

명희는 아이들이 귀를 먹지 않은 이상 들릴 정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명희와 남주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들은 명희와 남주가 당골래 딸들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아앙!”

남주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남주가 울어도 고무줄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힐끔 쳐다볼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고 그대로 놀이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