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고창 무장국민학교 3학년 교실.
“저리 비켜, 이 당골래 가시내야!”
문에서 교실을 등지고 서 있던 박명희를 사내아이가 거칠게 밀치고 교실을 나갔다. 명희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졌는데 갈색치마가 홀랑 위로 올라가면서 속바지가 들어나고 말았다.
“야, 저 가시내 빤스 보였다, 와!”
“빤스가 더럽다. 그렇지?”
“당골래 가시내 빤스는 지저분하구나. 하하하.”
“하하하…….”
사내아이들은 복도 바닥에 넘어져 어쩔 줄 몰라하는 명희를 손가락질하며 웃어댔다.
“아앙!”
명희는 얼른 치마를 아래로 내리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어버렸다.
“야, 당골래 가시내가 굿한다. 하하하.”
아이들은 명희 옆에 서서 그녀를 놀려댔고, 누구도 그녀 편을 들어주거나 일으켜 세워주는 아이는 없었다. 교실에 있거나 복도를 지나가던 여자아이들도 명희를 외면했다. 아이들은 하하하 웃으며 명희를 놀려준 뒤 복도 저쪽으로 걸어갔다.
“박주성!”
복도를 걸어가는 사내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사내아이들 중 박주성이라는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왜 사람을 밀치고 그러냐!”
“뭐?”
박주성이 대꾸하는 순간 반대편에 있던 아이가 박주성에게 달려와 그를 밀어버렸다. 박주성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강남준 이 새끼, 너 나 밀었어?”
박주성이 벌떡 일어났다. 강남준은 박주성보다 키가 컸다.
“남자 새끼가 왜 약한 여자아이를 밀어 넘어뜨리냐고!”
남준은 다른 아이들이 말릴 틈도 없이 다시 박주성을 밀었다. 박주성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그때 학교 종이 땡땡 울렸다. 공부 시간을 알리는 종이다.
“에이, 이 새끼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야, 얼른 들어가자 선생님 오시기 전에.”
다른 아이가 남준을 째려본 뒤에 박주성을 일으켜 세워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박주성은 뒤에 남아 있는 남준에게 주먹을 보이며 눈을 흘겼다.
남준은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간 뒤에 복도 구석에 서 있는 박명희의 팔을 잡아 교실로 끌었다. 명희는 남준의 손을 불편한 듯 밀쳐낸 뒤에 교실로 들어갔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모든 수업이 다 끝나고 선생님 훈화가 있은 뒤, 반장이 일어나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들은 모두 인사한 후 부랴부랴 보자기에 책과 공책을 싸 부리나케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강남준, 당골래 새끼, 너 강당 뒤로 와!”
박주성이 교실 밖으로 나가는 남준에게 호기롭게 소리쳤다. 아까 박주성이 넘어질 때 함께 있던 아이들이 박주성 옆에 몰려 있었다. 남준의 얼굴이 벌게졌다.
여자아이들 맨 뒤에서 교실 밖으로 나오던 박명희는 엄지손톱을 이빨로 물어뜯으며 난처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명희와 눈이 마주쳤지만 얼른 눈을 돌려버렸다. 명희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따라가지 마.’
남준은 고개를 들고 상체를 곧게 편 뒤 복도를 따라 박주성 일행 뒤를 따라갔다.
음력설이 지난 지 보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겨울 동장군은 얼음 도포 자락으로 온 세상을 덮고 있어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운동장 여기저기에서 난장을 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서둘러서 운동장을 지나 학교 문을 나가 분주히 집으로 향했지만 박주성 일행은 강당 뒤편으로 걸어가면서 그들을 따라오는 남준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희희덕거렸다.
“야, 당골래 새끼야. 나를 밀쳤어!”
남준이 강당 뒤로 돌아가 녀석들 앞에 서자, 박주성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가와 머리로 남준의 턱을 들이받으며 도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