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을 굳혀가고는 있었지만, 막상 박창수 앞에 서니 걸음이 선뜻 내디뎌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승락하는 거요?’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소. 강동식 씨는 일만 하면 된다고.’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너는 머슴이니 도끼질이나 열심히 하라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일을 못하겠소. 이런 말이 목울대까지 치받고 올라왔지만 침을 삼켜 눌렀다.
‘착수금을 주겠소. 어떻게 주는 게 좋겠소?’
동식이 먼저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박창수가 자꾸 먼저 치고 들어오는 것 같아 불편한 속이 더 불편해졌다.
“만나시지요.”
박창수는 동식의 요구에 잠시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나중에 청부한 건이 탈이 나면 면피하려고?
‘좋소.’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요?”
‘며칠 안으로 다시 연락하겠소.’
오늘도 강용대를 왜 죽이려 하는지 이유는 듣지 못했다.
‘이명주예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명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모르는 번호가 떠서 받지 않으려다 받았는데 뜻밖의 이명주였다.
반갑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여러 마음이 동식의 속을 복잡하게 얽히게 했다. 혼잡스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대답하는 동식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괜히 전화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명주가 전화기에서 떠나버리면 섭섭하다.
이명주는 오늘 저녁 농악전수관 공연장에서 농악 공연을 하는데 의미있는 공연이니까 와서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좋아할 것 같아 전화드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예, 가야지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아할 것 같아 전화 드렸다는데 어찌 안 간다고 말을 하겠는가.
농악전수관에서 이명주를 만났을 때, 동식은 그녀가 동식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감지했다. 이성적인 느낌으로 인한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꼈을 때의 감정이 아니었다.
동식의 디엔에이에 내재되어 있어 동식도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뭔가를 그녀는 어마어마한 질량으로 소유하고 있고, 그 아우라에 동식은 숨죽이고 복종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차를 몰아 농악전수관으로 갔다.
전수관 주차장에는 의외로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구석에 자리한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다니 농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걸 느끼며 동식은 놀랐다.
동식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자 막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무대는 조명이 꺼지고 사회자석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곧 사회자가 등장하였다.
“……고창 옛어른들은 농악을 굿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굿을 한다. 굿을 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고창농악을 3세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영무장농악의 틀을 잡은 쇠의 명인 박성근 선생과 장구 명인 김만식 선생을 1세대라고 한다면, 이분들로부터 굿을 배운 황규언, 전경환, 김오채 선생이 2세대라 할 수 있고, 오늘 무대에서 만나보실 분들은 2세대 선생님들에게 사사한 3세대 고창의 굿쟁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신명나게 놀아볼 굿판인 ‘판굿’은 바로 1세대 박성근 선생이 정립하신 것을 황규언 선생이 이어 받아 현재 세대에게 전승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연행할 판굿 ‘도둑잽이굿’을 연출하고 직접 상쇠로 연행하시는 이명주 선생은 고창 농악 3세대의 기틀을 잡은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고창농악전수관 관장과 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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