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다하여 붓을 놓는 그날까지, 8만 4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겠습니다"
전북 순창읍 금화사.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간에 법당에 불이 켜진다. 고요한 기도 도량에 스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는 경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도다.
도행 스님은 그렇게 하루를 연다. 지금까지 그가 불러온 이름은 4만여 명. 그리고 남은 목표는 4만 4천 명. 숫자보다 무거운 것은 그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과 아픔이다.
새벽 기도를 마친 스님은 묵향 그윽한 서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오늘도 용(龍)자를 쓴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원력이 담긴 용(龍)자. 이것이 바로 스님이 평생을 걸고 실천하는 '8만 4천 용(龍)자 비보'의 수행이다.
을사년 동짓날 오후, 순창 고추장 마을 옆 금화사를 찾아 도행 스님을 만났다. 그의 삶과 수행,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원력으로 감싸안는 보살행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스님, 먼저 출가 이전의 삶과 불가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입니다. 출가는 1995년 무렵이니, 비교적 늦은 편이지요. 젊은 시절에는 속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특별히 불교 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수행자의 길을 꿈꾼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님의 말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깊은 성찰이 묻어났다.
"다만 삶을 살아가며 마음 한쪽에 늘 허전함이 있었고, 사람을 돕는 일이 제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천안 수도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은사이신 원각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Q. 늦은 출가에 대한 고민이나 두려움은 없으셨습니까?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스님이 잠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나이가 있었고, 세속의 인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출가라는 것은 계산으로 하는 선택이 아니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때가 바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돌아보면 늦은 출가였지만, 제 삶에는 가장 정확한 시간이었다고 느껴집니다."
Q. 용(龍)자 비보를 전수해 주신 고당 스님과의 인연이 매우 깊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셨습니까?
"고당 스님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고통을 수행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스님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묻어났다.
"은사님께서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사고로 하반신마비 장애를 입으셨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절에 맡겨지셨지요. 그 이후 토굴에서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기도와 수행에 전념하셨습니다. 몸은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 마음과 원력은 누구보다도 강하셨습니다.“
Q. '용(龍)자 비보'의 시작도 고당 은사스님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사 스님께서 토굴에서 기도 수행 중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셨다고 합니다. 용을 타고 내려오신 보살님께서 붓 한 자루를 건네시며 '비보'의 법력을 내려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님은 서실 한쪽에 모셔진 은사의 작품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이후 은사님은 오로지 용(龍)자를 쓰셨습니다. 장애를 딛고 붓을 들어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편으로 '용(龍)자 비보'를 행하셨지요.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기도였고, 수행이었습니다."
1
Q. 스님은 은사스님 곁에서 오랜 시간 시봉하셨다고요.
"10년을 함께했습니다." 스님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연묵, 감식, 실행. 먹을 가는 일만 4년을 했고, 법을 배우는 데 3년, 직접 행하는 데 또 3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Q. 은사님의 마지막 순간도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은사님은 제 무릎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순간, 스승님께서 평생 붙들고 살아오신 '용(龍)자 비보'의 원력이 제게 넘어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길을 잇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스님이 쓰시는 '용(龍)' 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그 안에는 12지신의 모든 형상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 상극이 되는 띠와 기운이 한 몸 안에 공존하지요."
스님은 책상 위의 용(龍)자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돼지의 코, 토끼의 눈, 호랑이의 이빨, 말의 머리, 소의 귀, 양의 뿔, 뱀의 비늘, 닭의 발톱... 서로 부딪히고 상극이 되는 기운들이 용(龍) 안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Q. 그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씀인가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운이 다르고,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용(龍)은 그 모든 상극을 품고 화합으로 이끄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비보의 상징으로 용(龍)자를 씁니다."
스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제가 쓰는 용(龍)자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사주와 운기는 다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비보란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편입니다.“
Q. '비보'라는 수행을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요?
"비보란,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방편입니다. 사람의 사주와 기운을 살펴보고, 결핍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기도이지요. 저는 그 방편으로 융(龍)자 한 글자를 쓰고 있습니다."
스님은 강조하듯 말했다.
"중요한 것은 글씨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발원과 기도입니다."
Q. '8만 4천 용(龍)자 비보'라는 큰 원력을 세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교에서 8만 4천은 중생의 번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고통은 다양하고 많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는 수행을 해보자는 마음에서 원력을 세웠습니다.“
Q. 현재까지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금화사에 머문 지 10년이 넘었고, 지금까지 약 4만 명의 불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적은 두루마리를 '인명경'이라 부르는데, 현재 16뭉치가 있습니다. 이제 절반 정도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Q. 매일 그 많은 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수행입니다. 매일 새벽, 한 분 한 분 이름을 부르며 축원합니다."
스님이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절밥 얻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빚진 마음으로 늘 기도합니다."
Q. 스님께서는 절 밖에서도 사회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절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자신의 활동을 담담하게 소개했다.
"정인 스님께서 회장으로 계신 (사)한국노인복지회 전주시지회 부회장으로 어르신들을 돕고 있고, (사)한국장애인교통문화협회 전주시지회 부회장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또 순창 지역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지원도 조용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금 지원과 함께 쌀을 팔아서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Q. 이런 활동의 중심에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관세음보살님의 원력은 중생의 근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보살행을 흉내라도 내보려는 마음뿐입니다."
스님은 겸손하게 덧붙였다.
"드러내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말없이 돕는 것이 더 맞는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Q. 금화사 원통전(관음전)에서 기도가 필요한 분들의 이름을 용두 관세음 불상에 적어놓고 기도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금화사 원통전(관음전)에서는 불자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마음에 담아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행(목·화·토·금·수)과 오방(동·남·중앙·서·북), 그리고 오룡(청룡·적룡·황룡·백룡·흑룡)의 방위와 기운에 맞추어, 기도가 필요한 분들의 이름을 용두 관세음 불상에 정성껏 적어 봉안합니다."
스님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 원통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기도를 이어가며, 각자의 삶에 부족한 기운이 보완되고 마음의 평안과 길상이 깃들기를 발원합니다. 용두 관세음은 오행의 조화를 도와 인연의 흐름을 바로잡는 상징이며, 함께 모셔진 용(龍) 비보는 십이지신, 즉 열두 띠의 기운을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님의 목소리에 깊은 원력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서원의 과정입니다."
Q. 남은 생의 목표를 묻는다면요?
"단순합니다. 8만 4천 명의 인연을 다 채울 때까지 붓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스님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제 글씨 한 점, 제 기도 한 번이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수행자의 소임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스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운은 다릅니다. 부족함은 잘못이 아닙니다. 서로를 탓하기보다 감싸안을 때, 용과 같은 큰 화합의 기운이 생깁니다."
스님은 창밖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만 더 따뜻해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 만해질 것입니다."
[취재 후기]
도행 스님의 서실에는 닳아버린 붓과 수북이 쌓인 연습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4만 명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는 종이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은 한 수행자의 기록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도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절밥 얻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밥값은 해야지요." 그 소박한 말 속에 담긴 원력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4만 개의 이름이 증명하고 있었다.
묵향 가득한 방 안에서 스님은 오늘도 용(龍)자를 쓰고 있었다. 그 용(龍)은 세상을 호령하는 위엄의 상징이 아니라, 풍파에 지친 삶을 조용히 평온의 해안으로 이끄는 자비의 상징이었다.
스님의 붓끝에서 태어나는 용(龍) 한 마리 한 마리는, 어쩌면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화합의 손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4만 4천 명의 이름을 향해 묵묵히 수행하며 나아가는 도행 스님. 그의 여정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금화사의 새벽 기도는 계속될 것이다. /이만호 기자
■ 도행 스님 약력
-전북 고창군 성송면 출생
-1995년경 출가, 천안 국사봉 수도사에서 원각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수계를 받음
-2000년경 영천 덕흥사에서 고당 스님을 10년간 시봉하며 용(龍)자 비보를 전수받음
-현재 전북 순창 금화사 주석하며 '8만 4천 용(龍)자 비보' 원력 실천 중 (현재 4만여 명)
-(사)한국노인복지회 전주시지회 부회장
-(사)한국장애인교통문화협회 전주시지회 부회장
-순창 지역 다문화 가정 후원하며 무애사 정인 스님과 함께 이타행 실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