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접어든 직장인 L은 ‘품위유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머리에 가발도 얹히고, 차도 좀 ‘있어 보이는’ 차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L은 최근에 ‘G’로 시작하는 승용차에 꽂혀있다. 물론 출고된 지 4년 된 ‘하이브리드’형 SUV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덕에 7천만 원이 넘는 차를 반값으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연비 효율이 높은 것은 물론이고 엔진 소음 없이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승차감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보다도 마음을 끌게 만든 것은 ‘남들이 봤을 때’ 폼 나는 고급스러운 외형이었다. 

이 정도 외관의 SUV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좀 있어 보이는 SUV 운전석에 엉덩이를 걸치는 L의 겉모습을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라 생각하니 은근히 어깨가 으쓱했다. 

SUV를 굴리고 다닌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솔직히 보조금 덕을 본 SUV는 어쩐지 눈속임으로 억지 ‘고급’에 자신을 우겨넣은 것 같아 화장실에서 큰 거보고 뒤처리 안한 것처럼 찝찝했다. 

그러던 차에 “G”로 시작하는 차가 바싹 눈에 들어왔다. 저 정도는 타야 그럭저럭 일가를 이룬 것 같고 ‘고급’ 자리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G’는 가격 만해도 7천만 원 이상이지만 한번 꽂힌 필은 쉽게 거둬들일 수 없었다. 

물론 SUV도 그럭저럭 탈만 했지만 처음으로 출시된 하이브리드 형 SUV라 그런지 잔고장이 가끔 있었다. 그렇다고 차가 못 굴러 갈 정도의 고장은 아니었고 미세한 소음이 난다든가 내부의 편의시설 장치에 약간의 트러블 정도였다.  

“내가 차를 ‘G’로 바꾸려는 것은 SUV의 하자 때문이지 남들에게 폼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고!”

이런 말로 L은 ‘G'를 구입하고 싶은 욕구를 SUV의 하자로 핑계 대는 것이다. 

입사동기 K를 L은 이해할 수 없다. K는 구입한 지 20년 가까이 된 차를 지금도 타고 있다. K는 퇴직 때까지 이 차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다. 

퇴직할 때까지 함께한다는 것은 K가 자신의 차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걸 반증하는 거겠지만 K은 자신의 차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차에 먼지나 이물질 혹은 흙이 묻어 있는 경우는 없지만 군데군데 스크래치가 있거나 심지어 문짝이 약간 패이기까지 했지만 수리하지 않고 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차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차 곁도 깨끗하게 하고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게 해서 타고 다녀야하는 거 아닌가. 차에 애정은 있는데 돈은 쓰기 싫다는 건가. 

그렇다고 L이 돈 쓰는데 인색한 것은 아니다. 동료들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후배들에게 가끔 밥을 사는 등의 일상적인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은 했다.  

“차좀 수리해서 타고 다녀! 돈도 벌만큼 버는 사람이! 새차를 하나 뽑던지!”

하고 핀잔하면 L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스크래치는 이 차의 역사야. 사람도 나이가 들면 얼굴이나 몸에 주름이 만들어지고 잡티가 생기지 않아. 차도 마찬가지야. 내차가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더 정이 가.”

“남들 보기에 폼이 안 나잖아, 안 그래?”

“왜, 내가 남들에게 폼을 내고 잘 보여야지? 왜, 내가 내 돈과 에너지를 써가면서 이름 모를 대중들 앞에서 그들 눈을 즐겁게 하려고 춤을 춰야지?”

“남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자기만족’이라고.”

“자기만족? 자기만족이라면 만족의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정해야 하는데, 대부분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만족의 기준을 세우는 거 아닌가?”

K의 완강함에 L은 슬쩍 뒤로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가발이 진짜같이 좋다는데, 머리는 어떻게 할 거야?”

K도 L처럼 ‘민둥머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난 조금 더 머리가 빠지면 완전히 밀고 다니려고. 나는 ‘겉째’를 부리면서 살고 싶지 않네.”

“겉째?”

“겉으로만 꾸며서 멋 부리는 거 말이야.”

이 대목에서 L은 더 이상 K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세상 살아가면서 남들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없어 보이는 거 보다 있어 보이는 게 좋지 않은가. 

멋진 가발을 해서 머리에 척 쓰고 말리라. 또 ‘G’를 구입하리라 단단히 결심한다. 물론 많은 금액의 할부금 때문에 허리가 휘겠지만 ‘품위유지’하려면 그 정도 출혈은 감내해야 한다. 

오상근 / 본보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