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에 있었던 신문 읽기체험은 특이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회고록 연재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큰 경이로움에 숨막혀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몸과 마음이 분열되는 혼란 또한 느껴야 했다. 큰 사람은 타고나는 것인가 보구나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나 같은 보통 사람은 평생토록 별 볼 일 없이 살다가 갈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좌절을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은 구십이 넘은 고령인데도 정신이 또렷할 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이들 이상으로 글을 잘 썼던 것이다.
물론 그 신문에 연재된 대통령의 회고록은 분명히 대필자가 있었을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임종을 앞 둔 나이인데 그토록 아름답고 깨끗한 문장을 구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평생토록 문명을 날린 대문호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계 문학사에도 그런 사례는 없다. 손이 떨리고 쉬 피곤해질 정도로 고령이 되면 정신의 흐름 또한 질서 정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잠깐 동안이기는 해도 윤 대통령의 글쓰기 능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 글은 분명히 최치원(崔致遠)의 작품이다.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이 최치원의 그 격문을 최치원의 것으로 알았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그가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황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장수가 할 일이지 일개 문필가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납득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초등학생 때이다. 아무리 명문장이기로서니 황소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처럼 맥없이 항복했을까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았던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초등학생이 모르는 내용이 있기 마련인데 그 <토황소격문>도 그렇다. 그 글은 최치원의 것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이름도 거창한 토벌총사령관 고변의 것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토황소격문>은 그다지 긴 글이 아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단숨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은 글이다. 그 글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그 글은 강건체 문장의 전범이 될 만하다. 그리고 황소를 꾸짖는 대목은 매우 준열하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라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집필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최근에 그 보도를 접하고서 대필 작가의 긍지의 크기와 아픔의 크기를 함께 생각해보았다. / 이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