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봉] 차라리 꿈이길......

신라 때, 조신(調信)이란 젊은 스님이 있었다. 절에 딸린 농장을 관리하던 중 어느 날 그 농장을 찾은 고을 태수의 아리따운 딸을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하고 만다. 수도는 뒷전이 된 채, 그녀의 모습에 사로잡힌 채 오로지 그녀만을 애타게 그린다. 관음상 앞에 가서 남몰래 사랑의 성공을 빌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그 사이 그녀는 다른 배필이 생겨 결혼하고 만다. 낙심한 조신은 사무치는 연정을 참지 못하고 울다 지쳐 그만 잠깐 졸음에 빠진다.
갑자기 태수의 딸이 나타나, 자기 역시 조신을 연모했었다며 배필이 돼 줄 것을 자청한다. 너무나 기쁜 조신은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부가 돼 40여년을 함께 산다. 자식도 다섯이나 낳았다. 그러나 서로 늙고 병든 데다 가난까지 겹쳐 자식마저 둘씩이나 잃는 등 거친 세파에 시달리면서 부부갈등까지 느끼다가 만난 지 50년 만에 둘은 서로 갈라선다. 조신은 그야말로 고해(苦海)에서 허덕인 이 한 세상을 한숨짓다가 그만 잠에서 깬다. 모든 게 꿈이었던 것이다. 조신은 이 꿈으로 인해 인생무상과 탐욕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불도에 전념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동안 ‘꿈’이란 제목으로 몇 번 영화화되기도 했다. 저자 일연 스님은 이 이야기 끝에 「달콤한 한 시절, 지내보니 허망 뿐. 나도 모르는 근심 속에 이 몸 다 늙었다. 허무한 부귀공명, 다시 생각해 뭣하나. 괴로운 한평생, 한낱 꿈인 것을.(하략)」이라는 자작시를 덧붙이고 있지만, 이 정도 되면 조신의 삶에서 어느 쪽이 꿈이고, 또 어느 쪽이 현실인 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인생을 대몽(大夢)이라 했던가. 우리는 지금 어쩌면 모두 꿈을 꾸고 있는 줄 모른다. 누구든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잠을 깬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꿈인 줄 안다. 좋았던 꿈이라면 깬 뒤에 아쉬움이 남고, 꿈속에서 지긋지긋하게 나쁜 일들만 겪으면 깬 뒤에 안도의 숨을 짓는다.
그래설까. 거지들은 잠을 많이 잔다. 할 일도 없어서겠지만 단꿈을 꾸기 위해서다. 생시엔 갖은 하대(下待)와 구박으로 신세타령이 절로 나오지만, 꿈속에선 부자 장자가 되기도 하고 미녀와 연애를 나누기도 하고 대궐 같은 집에서 하인들을 거느리며 남부러울 것 없이 호의호식하기도 한다. 사실상 거지 신세인 노숙자 중에도 그 같은 이유로 잠을 즐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디 그들뿐이랴. 고달픈 현실을 사는 뭇 서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장기 경기침체에 따라 너나할 것 없이 어려운 현실을 살고 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계속되는 장기 경기침체 속에 허우적거리는 뭇 서민들의 이 고달픈 삶이 두드러지게 눈에 띤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게다.
어차피 꿈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크게 깨닫는다는 뜻의 오도(悟道)가 그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살이를 한낱 꿈이라고 보았던 장자는 제물론(齊物論)편에서 “오도(悟道) 뒤에야 비로소 지금까지의 삶이 다 헛된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오도(悟道)까지는 이르지 못할망정 지금, 소위 현실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기를 쓰고 아등박거리며 맹렬히 쫓고 있는 세상적 명예나 재물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다 헛되고 또 헛된 것이 아닐런 지, 한 번 쯤 되돌아 볼 일이다.

/서재철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