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봉] 매화 시편

지난 주말에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에 다녀왔다. 나 혼자 갔던 것은 아니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관광이나 야유회가 목적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주변의 풍광이 좋아서 눈요기가 상당하였다. 전주 지역에서는 나무들이 신록을 드러내고 있는 데 거기는 그렇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곳은 아직도 이른 봄이었다. 산수유 노란색이 약간 바랬을 뿐, 모든 꽃나무들이 3월 하순내지 4월 초순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지대가 높은 고랭지라서 그러리라는 짐작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만발한 벚꽃 옆에서 더 싱싱한 매화꽃을 볼 수 있음은 별스러웠다. 평야지대에서는 매화꽃이 온전히 진 다음에라야 벚꽃이 피는데 말이다. 그것도 4월 하순에 그러고 있다니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삼국사기의 본기에나 오를 법한 쾌거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올 봄에 매화꽃을 실컷 보려고 했다. 적어도 지난해보다는 더 많이 보려고 작심을 했었다. 그러나 욕심뿐, 나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나의 탓이지 다른 누구의 탓이 아니다. 아쉬움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차에 서상면의 도천 마을과 피적래 마을과 방지 마을에서 매화나무들과 한 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음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의 매화 사랑은 아기 걸음마 수준이라는 것을 안다. 임포의 고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우리의 선조 중에도 매화를 사랑했던 이들은 많다. 그중에는 평생 매화를 소재로 백 편이 넘는 시를 쓰고 또 그 시편들을 시첩으로 엮어낸 분도 있다. 이퇴계가 바로 그분이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홍유(鴻儒)임에도 매화 앞에서는 영원한 낭만파였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해 사람을 부르듯 매형(梅兄)이라고도 하고 매군(梅君)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 매화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았다.
이퇴계의 시 중에 널리 알려진 <陶山月夜詠梅>라는 작품이 있다. 제목을 옮기자면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가는 봄을 붙잡아 그 발길을 늦추어 보려고 한다.
홀로 뜰을 걷고 있자니 달이 나를 따라오는구나. / 매화를 옆에 두고서 몇 번이나 돌고 돌았던 것일까. / 밤이 깊도록 앉은 채로 일어날 줄 몰랐나니 / 옷과 두건에 향내 가득히 배고 그림자는 몸을 덮고 있구나.

/ 이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