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초대 조선공사의 공덕비 까지 일찌감치 남의 땅에 세워주었는데 우리 땅에는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부터 111년, 1910년 8월 29일 경술 국치일인 한일 강제병합조약 서명일로부터 106년, 해방된 후부터도 71년이 지난 후에야 그것도 정부가 아닌 시민단체의 모금에 의해 일본통감 관저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지고 그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이 조성되고 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는 경구도 큰 돌 위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역대 우리 정부는 일제의 만행이나 국권찬탈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친일 부역인물들과 그들의 부귀영화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후손(요즘 유행하는 말로 ‘shy Japan’ 이라고 해야 할지) 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나마 일부 의식 있는 시민단체가 나서서 그러한 역사를 기억하고자 이런 작은 추모공원이라도 만들었으니 쓰라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정부보다는 시민들이 맡아야 해야 하는 업보인 듯해서 늦가을의 낙엽을 밟는 것 같은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 추모공원 아래 필동으로 내려오니 '한국의 집' (Korea House) 이 보였다. 1980년에 한옥 건물들로 신축된 한국전통문화체험공간이다. 이곳은 조선 세종때 집현전 학사였고 형조참판으로 단종을 모시다가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다음 그 1년 후에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사육신의 일원이 된 박팽년의 집터라고 한다. 사육신은 그 재능을 아까워한 세조의 회유도 정통성 없는 왕권 탈취는 인정할 수 없다고 끝내 거절하고 대신 모진 고문과 일족의 몰살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택하였으니 이완용 류의 친일 부역자들에게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천치로 치부될 인물들일 뿐일 것이다.
인근에서 간단히 ‘혼밥’ 을 먹고 나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만 시민들이 부정한 박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시위 현장인 남대문과 시청 광장으로 옮겨졌다. 그런 인파는 평생 본적도 없는데 인파에 치여 불의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이제 죽음마저 두려워할 나이도 아니니 오래 머물지는 못하더라도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정의를 실현코자 열망하는 그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다. 여러 단체에서 집단으로 참석한 사람과 자발적으로 모여든 남여노소가 그저 엄청날 뿐 경찰 추산 몇십만이니 주최측 추산 백만이니 하는 숫자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바쁘고 어려운 시간을 희생해서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 촛불을 밝히겠다는 성의에 가슴이 벅찰 뿐이었다. 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보고 " L'etat, c'est moi " (짐이 곧 국가)의 유신시대를 살고 있는 시대착오적 대통령과 그를 영명한 절대군주이며 여왕님인양 맹종하면서 온갖 추잡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추종자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지는 의문이지만 힘없는 백성들이 이런 시위나마 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어느 날에 그 이름에 걸맞는 ‘대한민국’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최병효 / 주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