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빛, 맛, 향기, 소리에 취하고 싶을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은 커피향에 취하고 싶고, 눈이 내리는 날엔 설경에 취하고 싶기도 하고

요즘같이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 옛사람들의 그리움에 취하고 싶다.

쨍쨍 내리쬐던 무더위가 지나고 고창 선운산 골짜기 

꽃무릇이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어 산천을 뒤덮을 때 

도솔천 샛길에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이름 모를 풀꽃처럼,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헐렁한 옷 걸쳐 입고 친정집 다녀오듯 산사 찻집에서 옛 친구를 만나 차 한 잔 나누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이는 산사 풍경 소리에 취하고 어떤 이는 동불암지 마애 여래 좌상의 자비에 취해 일어설 줄 모를 때, 나는 내원궁 지장보살님께 삼배 올리고 천마봉의 진풍경을 바라보며 공허한 마음을 바람으로 채우고 싶다.

다른 이들도 가끔씩은 나와 같을까?

찬바람이 불어오면 괜스레 손이 근지러워 엽서 한 장으로 그리움을 대신하는 빨간 우체통이 생각난다

학창시시절 즐겨 들었던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와“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달콤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사연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는 계절!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란 노래가 들릴 것 만 같은 

휴일 오후면 창문 열어 가을바람 방안으로 들여놓고 핸드폰으로 보내온 글 읽으며 그들의 향기를 맡는다.

요즘 들어 가을 타는 사람들에게서 보내온 문자에는 딱 잘라 뭐라고 쓰기가 어색해서 

저장된 사진 파일에서 꽃 무릇 사진 한 장 꺼내어 보내 주면, 그들도 길가에 핀 코스모스 

풍경 사진을 보내온다.

그렇게 몇 번의 문자가 오가다 말문이 트이면서 산행 얘기며 사소한 일상의 얘기들이 줄을 서고 지난날 즐거웠던 일들을 들려주어 나도 덩달아 살아가는 맛을 느낀다.

오랜만에 보내온 소식들 속에서 엊그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처럼 반가워지며 그들의 웃음 띤 얼굴과 옛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추억에 취하고 싶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연들이 이른 아침의 이슬방울처럼 메말랐던 내 가슴에 영롱하게 맺혀져 먼 훗날 이야깃거리를 남겨 주니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올가을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에 취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사진으로 담아 두고두고 좋은 추억을 내 마음 깊은 곳에 겹겹이 쌓아 두어 먼 훗날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안길에 오롯한 그리움을 혼자서 꺼내 볼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보따리를 만들고 싶다.

  

/정 명 숙 고창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