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39세 때인 1800년 6월 28일,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던 정조(正祖) 임금이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누구보다도 절망했던 사람은 다산이다.
그가 손수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정조대왕께서 나를 총애하시고 칭찬하심이 동료들보다 훨씬 심했다.”고 회고한 것처럼, 그는 정조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조와 다산은 단순한 군신관계를 넘는 동지이자 가족이었고, 다산에게 정조는 단순한 임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산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모두 막아주던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정조가 죽었으니 다산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을 것이다. 정조의 죽음은 신세대가 몰락하고 구세대가 다시 살아나는 반동의 시작이고, 개방과 다양성 대신 노론 일당의 폐쇄와 횡포가 시작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다산을 공격하는 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정약용 무리들이 앞으로 난리를 꾸며 4흉8적(四凶八賊)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4흉8적은 노론 벽파의 재상들과 당대의 이름 있는 명사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정조의 죽음으로 부모 잃은 고아 꼴이 된 정약용 무리들이 그런 4흉8적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게 중요한 것은 소문의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오로지 정약용을 제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다산은 먼저 처자식을 고향 마재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홀로 서울에 남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졸곡(卒哭)이 끝난 겨울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땅으로 돌아가 책이나 읽으며 세상을 잊겠다는 결심으로 고향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내건다. 앞으로는 더욱 머뭇거리고(與) 망설이며(猶) 살겠다는 뜻인데, 여유(與猶)란 말을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이다.
-머뭇거리는 모습은 겨울에 냇물을 건너려는 것 같고, 망설이는 모습은 사방에 있는 이웃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뼈를 깎는 차가움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않고,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 것처럼, 자신도 이제부터는 더욱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 세력이 될 수 있는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다산 집안은 그런 노론의 마수에 걸려 풍비박산 된다.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도 신지도로 유배가고, 다산은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정녕 다산이 한탄하던 천명(天命)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망설이고 머뭇거려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판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김삼덕/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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