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혹독한 순회공연 일정은 힘들다. 일하는 시간은 길고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가족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여서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봉급이 특별히 내세울 만큼 높지도 않다. 게다가 여러분의 연주가 삐끗한다거나 여러분이 유통기한을 넘어섰다고 판단되면 여러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신예 실력자들이 줄을 서 있다.

   LSO의 수석 플루티스트인 가레스 데이비스는 자신이 펴낸 '길 위의 오케스트라'에서 정상급 오케스트라 자리가 주는 부담감은 엄청나다면서 이같이 썼다.  "누군가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 쌓아온 솜씨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무대에서는 뭔가 잘못되어도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솔로이스트처럼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아니다. 자신들을 이끄는 지휘자처럼 추앙을 받지도 않는다. 100명에 가까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묵묵히 일한다. 하나의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소임을 다한다. 

 더구나 1904년 창단한 LSO는 세계 곳곳에서 연주하는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도 길어 평생 동안 20년을 출퇴근에 쓸 정도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데이비스는 LSO의 이 여행에 쌓인 시간을 다룬다. LSO는 1912년 역사적인 북미 대륙 순회공연을 떠난다. 영국 악단으로서는 최초였다. 당시 LSO는 스타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와 함께 뉴욕을 출발, 중부 캔자스시티와 위치타를 거쳐 캐나다의 세 개 도시를 돈 후 다시 보스턴과 뉴욕으로 마무리하는 3주 대장정을 펼쳤다.

 실연이 아니면 음악을 듣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미국에서 명망이 높았던 지휘자가 이끄는 유럽 최고 악단의 순회공연은 커다란 센세이션이었다. 당시 순회공연을 떠났던 팀파니 연주자 찰스 터너와 플루티스트 헨리 니스벳의 일기가 더해지면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데이비스는 1912년과 2012년 LSO의 세계 투어 이야기를 번갈아 배치한다. 100년 전과 오늘날 오케스트라 연주자 삶의 차이와 공통점을 비교한다. 

 100년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1912년 LSO 단원들은 3월29일 미국행 배에 올라 4월6일 뉴욕항에 도착했다. 장장 열흘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런던에서 뉴욕까지 6시간20분이면 그만이다. 

 1912년에는 오케스트라에 여성이 딱 한 명 있었다. 하프 연주자인 미리엄 티모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뛰어난 여성 연주자들이 LSO 단원으로 있다. 이런 차이점에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 있다. 각자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연주자들의 존재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눈으로 바라본 명 지휘자들의 모습이다. 100년 전의 니키슈부터 오늘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물론 2013년 세상을 떠난 콜린 데이비스 경,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그리고 작년 LSO를 이끌고 한국에 왔던 수석 객원 지휘자 대니얼 하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연주회 중에 지휘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데이비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LSO가 연주하는 말러의 9번을 하루는 하이팅크의 지휘로, 하루는 발레리의 지휘로 들어보면 지휘자가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 쑥 들어갈 것이다. 콜린이나 베르나르트와 베토벤을 연주하다가 엘리엇이 지휘봉을 들면 스위치가 찰칵 켜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LSO는 2006년 처음 한국을 찾은 이후 2012년 게르기예프, 2013년 하이팅크와, 작년엔 하딩과 함께 왔다. 당시의 경험을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볼 수 있다. 데이비스는 "서울은 뉴욕과 런던의 에너지를 모두 합쳐놓은 것처럼 활기찬 곳이었다"면서 "결코 잠들지 않는 도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앉을 생각도 하지 않는 도시 같았다"고 회상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도 협연한 바 있는 김선욱은 "한 세기가 넘는 역사와 전통, 탄탄한 조직력, 다양한 색깔의 음악을 프로페셔널하게 소화하는 장점은 많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이 악단과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324쪽, 1만8000원, 아트북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