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로 그린 세상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연필로 그린 모양은 동그라미가 아닐까? 이는 인생의 기초이며 본능임을 의미 해주는 대목이다. 동그라미와 원(圓)은 우주의 진리를 뜻하며, 인간의 근본이다. 인간이 삶을 위해 겪고 있는 고통은 어쩌면 동그라미를 얻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요철 그릇에 물을 천천히 따라 보자. 물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낮은 곳을 찾아 흘러 수평을 이룬다. 이는 동그라미만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 진리다.
성장의 지난날을 그리움으로 되돌려 본다. 동그라미 숫자에 기뻐 환호하였고, 슬픔으로 낙심했던 추억이 탈색된 세상 수면 위로 떠오른다. 꾸벅이는 졸음을 쫓으면서 책과 시름하던 때도 목표는 동그라미였다. 험악한 세상과 싸우고 있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시험지에 그려진 동그라미 숫자를 헤아리는 순간의 초조감이 지금도 가슴 조이게 한다. 세상 진리의 주인 격인 동그라미에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그라미는 언어의 소통이 불가능할 때 표현하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거나 양팔을 올려 동그란 표현을 하면 합격이요, 만족의 표현임을 알아차린다. 신기하게도 동그라미는 세계 어느 곳이든 의사전달 표현이 같다는 거다. 동그라미가 인간 삶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크기를 짚어주는 대목이다.
존재하는 모두를 하나로 모아 그릴 수 있는 도형은 오직 동그라미뿐이다. 동그라미의 내면에는 자연미의 순진성과 진실성이 흐르고 있다. 이는 가치와 배려의 순환이며 하나로 뭉쳐주는 평화의 구심점이다. 각종 열매를 살펴보자. 하나같이 동그란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동그라미가 그냥 허술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심한 진리의 구조로 완결하게 조립되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있다. 시각으로는 윤곽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안과 밖을 경계해주는 벽이 있다. 원심력은 확장해주고 구심력은 도형을 추슬러준다. 자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우주 역시 빅뱅 하는 커다란 동그라미다.
예부터 내려오는 ‘끼리끼리’라는 속말이 있다. 이는 세상의 재난이며 컴퍼스로 그린 원이다. 화목에 역행하는 비극의 씨앗이다. 오늘날 지구촌은 글로벌시대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뭐든지 척척 해내는 초고속 첨단 시대에 살고 있다.
민족 비극의 쓰라린 아픔을 더듬어 본다. 이것 역시 하나 되는 동그라미 울타리를 외면하고, 끼리끼리라는 분열이 불러온 참극이다. 조국 분단도 서러운데 권세의 욕망에 눈이 먼 이기주의자들이 갈라놓은 행태다. 뜻있는 외침 소리에 화합으로 돌아서야 할 때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돌아오면 다시 꺼내 들고 선동한다. 망국으로 가는 지역감정 사슬을 자르지 못한 원인은 일부 못된 정치인들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 말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고 속으론 일신의 영달만을 꾀한다. 그래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일부 지역은 밉보여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오고 배려는 배려를 불러온다. 앙심과 오기로는 수평 된 국가가 형성될 수 없다. 동그라미로 세상을 그릴 줄 아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이제 싸움은 그만하자. 끼리끼리가 흘려놓은 선조들의 핏자국으로 역사는 깨우침을 주고 있다. 허울 좋은 겉모양은 아니다. 동그라미 같은 도형으로 불균형을 타파하고 후손을 위한 알톨 같은 속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국민 모두의 몫이지만, 또한 국가권력의 결제 권한이 있는 분들의 몫이다.
별들이 은은한 광채로 사랑을 찾고 있다. 마을 모두가 동그라미로 함께 화합하는 강강술래가 떠오른다. 민족 명절을 찬란하게 빛낸 팔월 달빛은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동그라미 달빛 조각이 알알이 익어가는 호남 벌판을 일렁이고 있다. 능력을 차등하지 않는 품앗이로 협동하는 가을걷이의 흥겨운 모습이 이슬처럼 서성인다. 함께하는 그 날의 아름다움이 강강술래와 함께 그리움으로 아롱거린다. 동그라미로 미소 짓는 내 입가에서 풍요로운 가을밤이 익어가고 있다. 동그라미로 그린 세상, 화합을 이루며 살자.

백 승 록/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