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에 이어>다정한 덕담으로 함께 한 시간 속에서 다시 십일월 ‘김장하는 날’을 잡고 각자의 처소를 발길을 돌렸다. 어린 시절 명절이나 생신이면 서울에서 생활하는 형님과 누님들을 기다리시던 생전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동네 어귀에 나가 서성이던 아버지의 그림자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나는 시골을 벗어날 생각만 했었다. 비록 지질하게 가난해도 그곳이 좋음을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아련한 부모님의 ‘기다림’을 자녀에게 최대한 ‘부담 아닌 부담’으로 자리 잡게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언제 오니?’, ‘오늘 몸 상태는 어때?’ 등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그런 부모와 자녀가 되지 않을까?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가능하면 자녀와의 추억은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 너무나 짧은 세상살이에서 그 정도는 지나친 욕심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음은 늘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이다. 방법은 나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주말이나 공휴일 휴가 등을 활용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주변의 공원이나 뒷동산을 걸으며, 아기자기한 추억의 저금통을 채워보자.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생명을 먹여 살릴 수 있듯이, 우리가 실천하고 만들어가는 소소한 일상들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빅이벤트나 특별행사로 만족함을 얻으려 하지 말자. ‘커피 한 잔’, ‘따뜻한 한 마디의 말’, ‘보이지 않는 기도와 배려’에 감사한 일상의 한 페이지를 남길 수 있는 순간순간에 집중하자. 

알록달록 올려진 과일 전시장에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요거트 춤추고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일흔여덟 촛불 붉디붉게 부끄러워 이글이글 타오르고 

코스모스 넘실대는 낯익은 곡조에 웃음으로 주인공은 소녀인 듯 방긋방긋   

그렇게 부끄러워 넘쳐나는 고운 목소리에 함지박 시어진 김치처럼 사랑이 익어간다

                                        (시인 박여범, ‘기억하자 꺼내보자’ 중에서) 

 

어머님이 방긋방긋 던져주신 웃음, 어느 가수의 노래보다 감동을 안겨준 아버님의 노래와 춤, 성악가의 웅장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처남, 동영상 촬영과 박수로 웃음마당을 만들어 준 가정에 영원히 잊지 못할 ‘어머님의 칠십팔 회 생신’을 기억하자. 그 마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내는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나누고 꺼내보자. 

수채화처럼 높고 높은 가을 하늘에 선명한 기억을 꺼내보자. 가끔은, 아주 가끔은, 스마트폰을 통해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켜주는 노래와 춤에 웃음까지 다양했던 잊지 못할 어느 가을날의 생신을 기억하자. 항상 웃고만 살 수 없는 현실에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짧지만 강렬했던 어머님의 일흔여덟 생신과 햇살 가득 행복한 시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자. 

박여범 <용북중학교 교사·시인·문학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