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 햇살은 고운 노을빛으로 내려앉았다. 저녁놀을 바라보며 창가 앞에 서본다. 잠시 후 어둠이 소리 없이 내리고 황량한 들판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둠이 채색된 창가엔 가로등불빛이 투명하게 반사된다.
  하루가 저물고 시린 밤이 오면 그리움의 강물이 가슴을 적신다. 세월 저 편에 차곡차곡 쌓아둔 유년의 추억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고향 초가마을 곳곳에 희미한 호롱불빛이 창호지문에 아른거리고 있는 모습. 산 밑을 돌아 흐르는 깊은 물에 멱감고 놀던 일. 포플러나무 끝에서 서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 쫓던 추억. 눈 오는 겨울밤 개구쟁이 친구들과 떼 지어 놀다 눈을 뭉쳐 뉘집 문간에 던지고 도망치며 가슴 졸였던 일들이 영화 스크린처럼 스쳐 지난다. 
  이중 호롱불을 접했던 건 1970년대 초반까지다. 그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산간마을엔 집집마다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호롱불은 조금만 움직여도 불길이 좌우로 흔들린다. 방안은 워낙 어두워 바늘귀를 꿰려면 불 앞에 갖다 대야 보인다. 그 불빛 아래 엎드려 나는 공부를 했고, 어머님은 밤새 삼을 삼거나 바느질을 했다. 그리 멀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벌써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게 세월의 속성인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세월의 속성인가. 세월은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오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모든 사물은 세월에 의해 옹골찬 열매가 영글기도 하나, 세월에 의해 꽃다운 청춘이 시들기도 한다.
  태어나서 죽음까지는 결코 긴 세월이 아니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유수 같은 세월은 일시 정지도 불가능하고, 속절없는 세월은 속도 조절도 불가능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어느 일순간의 일이고,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어느 일순간의 일이다. 세월이 흐르면 늙어야 하고, 세월의 덫에 얽매어 허둥대다보면 어느새 노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월은 결국 모든 인류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장자는 “천지는 주막이고, 인간은 거기서 사철을 묵었다가 가는 나그네”라고 말했다. 또 쇼펜하우어는 “무한한 고통도 영원한 즐거움도 변치 않는 인상도 전 생애를 일관하는 그 어떤 결심도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 속에 녹아서 없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이다.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간은 변화가 없는데 인간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는 뜻으로 들린다.
  나는 이 말들을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잠시 주어진 기간을 살다 가는 방문객들이니, 순리대로 주워진 생명에 감사하며, 자연과 더불어 욕심 없이 살다 가라.’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답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삶은 그저 고통의 연속이고 생지옥이 될 것이다.
  이제 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 산과 들의 마른 나뭇가지는 실눈을 뜨고 있다. 주택 정원의 목련도 솜털 보송보송한 꽃눈을 매단 채 꽃봉오리를 피워 올릴 준비에 바쁘다. 차가운 강물에 발을 빠뜨리고 있는 버들강아지도 꽃눈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겨우 내내 깨알만한 꽃눈을 꽁꽁 움츠리고 있던 매화는 벌써 눈을 크게 뜨고 우릴 부른다.
  어느새 봄은 우리 곁에 왔다.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하얗게 수놓는 뭉게구름이 아지랑이 가물가물 이는 봄을 태우고 달려온다. 들녘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은 봄을 싣고 유유히 흐른다. 모악산 산등성이 저 쪽에서는 희부연 안개 속에 몸을 숨긴 봄이 실루엣으로 어른거린다. 비가 그치고 나면 봄맞이라도 가야 할 것 같다.
/신영규 신문학 전북지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