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점 씩 눈이 내린다. 성긴 눈이다. 성긴 눈들은 금세 밀도가 높아진다. 아까의 성긴 눈도 지금의 밀도가 높은 눈도 조용하다. 하나같이 소리가 없다. 금세 폭설로 변한 많은 눈들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눈 내리는 속을 걸어간다. 그러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선 채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이루 다 셀 수 없는 눈송이들의 수를 헤아리다가 내 상념은 먼 옛날의 어느 한 시점에 가 꽂힌다. 상념이 꽂힌 그 자리에서 애절한 추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체의 모습을 환하게 밝힌다. 그러나 환한 밝힘의 순간은 단명하다. 아름다움이 천천히 멀리 침침한 속으로 사라진다.
@FI 되었다가 시나브로 FO 되면서 사라지는 추억이 어찌 나 혼자만의 것일까.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영혼의 스크린에다 추억의 활동사진을 비추었다가 그것을 오래 붙잡지 못하고 날려 보내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념이 연출한 주연 배우들의 속삭임은 대부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왜냐하면 눈은 언제나 순백색이고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날이면 영혼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혼의 정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안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감동할 줄 모르는 오십 대이다. 그래도 나는 검은 외투의 옷자락에 내린 하얀 눈을 굽어보면서 영혼의 정화가 있었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야 젊은 날에 보았던 좋은 영화며, 그 무렵에 읽었던 책 속의 장면들이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늘처럼 많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예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그 무렵에 읽었던 두툼한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지간해서는 실천하기가 어렵다. 나에게는 내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허락돼 있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젊은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할 때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귀가하면 김진섭의 수필 <백설부>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하룻밤 사이에 다 읽어낼 수는 없지만 청천(聽川)의 짧은 이 글은 서너 번이라도 반복해서 읽고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 논설위원 이 희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