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씨>고려통일 공세운 중국인 대장군 조정이 시조

최종등록 10-12-08 19:33 최종수정 11-01-12 19:33

온라인이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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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의 성씨순례 - 함안조씨(咸安趙氏)

시조 조 정(趙鼎)은 중국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아우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 그 뒤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시조의 후손들이 함안에 터를 잡고 살면서 함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조안경은 충정왕 때 호조전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한 후 관직을 떠나 해주에 은거했다. 그는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아들 조성옥은 조선조에서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조 여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함안에 돌아가 평생 나오지 않았다. 정조 5년 단종 양위와 사육신 등에 관련된 사람들이 복관될 때 그는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조종도는 선조 때 안음현감과 함양군수를 지냈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했다. 조영호는 숙종 때 진사시에 합격한 후 천거로 등용되어 도승지와 개성유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였다. 


 조중회는 영조 때 수찬, 승지 등을 지냈으며 1751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2년 승지로 있을 때 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극간하다가 무장에 유배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는 풍천보통학교를 거쳐 송화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1926년 3월 군청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해 신천군청에 근무하던 중 6·10만세운동, 송학선의 금호문의거(金虎門義擧), 나석주의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 등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大阪)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商工專門學校)를 다녔다.


 그러나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상해임시정부로 출발하여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에 도착했다. 그는 타이중 시(臺中市)에서 일본인 이케다(池田正秀)가 경영하는 차엽농장(茶葉農場)의 고원(雇員)으로 일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타이완 총독 야마가미(山上)를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타이완인 장톈디(張天弟)로부터 보검도(寶劍刀)를 구입해 검술을 연마하면서 때를 기다렸으나 거사의 기회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산둥 성(山東省)을 공격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타이완은 그 전진기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그곳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1928년 5월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일본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육군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로 했다.


 5월 14일 타이중 시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의 환영인파 속에서 기다리다가 구미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그를 칼로 찌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후 구니노미야는 온 몸에 독이 퍼져 6개월쯤 앓다가 죽었다.


 같은 해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일제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의거는 일본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 항일투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국문학자 조윤제(趙潤濟.1904∼1976)의 호는 도남(陶南)이며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그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생으로 문과에 입학,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으며,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임명되었으며, 이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晉泰), 뒤이어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입장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 및 동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동 대학원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일제하에서 자비로 출간한 《조선시가사강》(1937)을 필두로 《교주 춘향전 校註春香傳》(1939)·《조선시가(朝鮮詩歌)의 연구》(1948)·《국문학사 國文學史》(1949)·《국문학개설 國文學槪說》(1955)·《한국문학사 韓國文學史》(1963) 등 20여권에 이르며, 논문으로는 1929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조선문학과 한문학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50여편, 수필·잡문 등은 거의 100편에 이른다.


 이들 저서와 논문들은 모두가 이른바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된 것들로, 일제하 황무지였다고도 할 국문학연구에 있어 개척자적 역할을 하면서 광복 후에는 국문학연구의 출발점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는 진지한 민족독립운동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조용은(趙鏞殷)은 임시정부의장을 지내면서 시사촉진회(時事促進會)를 조직했다. 그는 해방 후에 국민의회의 상암위원회의장을 지내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했다. 1950년 5월에 있은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조효동(趙孝仝)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친시 병과(丙科), 조참(趙參, 1473 癸巳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식년시 병과(丙科), 조강(趙講, 1473 癸巳生) : 문과(文科) 태종11년(1411)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조완식(趙完植, 1788 戊申生) : 문과(文科) 순조25년(1825) 식년시 병과(丙科), 조시원(趙時瑗, 1627 丁卯生) : 문과(文科) 현종4년(1663) 식년시 병과(丙科), 조근(趙根, 1631 辛未生) : 문과(文科) 현종7년(1666) 별시2 을과(乙科), 조영복(趙榮福, 1672 壬子生) : 문과(文科) 숙종40년(1714) 증광시 병과(丙科), 조중명(趙重明, 1701 辛巳生) : 문과(文科) 영조26년(1750) 알성시 병과(丙科), 조성익(趙性翼, 1842 壬寅生) : 문과(文科) 고종29년(1892) 별시4 병과(丙科), 조종례(趙從禮, 1842 壬寅生) : 문과(文科) 태종2년(1402)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등 모두 139명이  있다. 문과 32명, 무과 16명, 사마시 91명이다.


 주요 세거지는 경북 청송군 현동면, 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항리,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등이다.


 본관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옛 함안군과 칠원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이다. 주요파는 ▲통판공파 ▲충순공파 ▲사인공파 ▲고죽재공파 ▲산원공파 ▲참지공파 ▲참판공파 ▲집의공파 ▲판결공파 ▲사과공파 ▲내헌공파 ▲남계공파 ▲절도공파 ▲현감공파 ▲참봉공파 ▲소윤공파 ▲제학공파 ▲덕곡공파 ▲전서공파 ▲함경공파 ▲참의공파 등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259,196명이다.


( 언론인, 성씨 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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