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화(철학박사, 전주시의회 의원)

모처럼 천변을 걸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에 갇혀 살면서 건조해진 내가 서서히 자연 속에 동화되어 마치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내가 이들과 하나가 된 것 마냥 말을 걸고 조용히 이들의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상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상담자인 내게 자연은 좋은 스승이다. 자연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고 교훈을 얻어 새로운 힘을 충전한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고 상처가 없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고 상처가 있다. 시련과 상처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와 상처 속에 함몰되어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선택을 하면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부정적인 선택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다시 긍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어 선순환이 되고 부정적인 결과 나오면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어 악순환이 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유태인인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 사이에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권한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나치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비참한,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을 돋게 하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체득하였다. 그는 나치 독일 유태인수용소 생활의 참혹한 상황에서도 “왜 사는가를 알고 있으면 대개는 어떠한 시련에 부딪히건 견디어낼 수 있다”는 니체의 격언을 암송하면서 자신의 절망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아내를 품에 안아보는 것’이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고 그의 저서에서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남은 삶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공포와 싸우면서도 어떤 절망에도 희망이, 어떤 존재에도 거룩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후학들에게 몸소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나는 그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는 것,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배운다. 변화된 자만이 변화시킬 수 있고 치유된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과 대지가 만나는 그 순간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씨앗을 골라 받을 수 없는 대지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의 느낌이 씨앗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씨앗을 받아들이는 대지의 마음만큼, 씨앗을 품는 대지의 사랑 크기만큼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될 터이니 말이다.

천변을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더니 제법 빗줄기가 굵어진다. 천변을 흐르는 물줄기들이 빗물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또 궁금증이 발동한다. 선택과 의미를 부여한 그 마음이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닷물의 존재가 될 것이니 말이다. 뒷덜미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가 내게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