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생명이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의 실체를 살려내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이 있어 우리의 역사가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들고 한글을 창제 문맹자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는 가히 세계적 기록 문화를 손꼽는 책의 왕국이라 할만하다.
 아내가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진 책을 한 권 주워왔다. 어린이집에서 교육용으로 사용한  동화책이다. 매우 고급스런 장정을 한 값진 책이다. 책갈피에는 어린이가 쓴 독후감과 함께 그림도 그려져 있어 자녀의 성장 모습이 담겨진 개인 기록물이기도 하다. 이런 책을 버리다니 쯧쯧,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편 아파트의 공간 구조상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사정도 이해는 간다. 신학기 때나 이사철이면 교과서 참고서 잡지 등 많은 책들이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사전류나 종교서적 등 아까운 책도 눈에 띤다. 이 책들이 한낱 폐지로 고물 수집상을 거쳐 종이재생공장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칠 것이다.
 전주 동문거리는 70~80년대까지만 해도 서점가였다. 헌책방이 즐비했다. 그만큼 헌책으로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문시장 사거리에 책을 쌓아올린 형상의 탑을 세워놓은 것을 보면 알만하다. 지금은 근처 관통로 팔달로 할 것 없이 서점은 사라지고 대신 휴대폰, 커피숍, 옷가게, 편의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터줏대감격인 홍지서림과 외국어 전문서점 그리고 헌책방 세 곳이 남아있어 그래도 아직은 서점가의 명맥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
 골목에 자리한 헌책방에 들렀다. 널찍한 매장엔 온갖 책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 창고처럼 꽉 쌓여 있다. 그런데 신간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옛날 책들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그 유명한 브리타니카 세계백화사전 전질을 비롯하여 30권으로 된 방대한 퇴계전서, 내로라하는 문중의 족보, 각양각색의 사전류, 인문학 전집류, 각 지방 학교 단체들의 연혁지, 40여 년 전 을유문고판 등 참으로 사라지면 안 될 귀한 자료들이다. 보석 같은 이 책들이 제지공장 재생창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있음을 감사한다. 1998년에 출간된 안병욱 에세이《후회없이 살아라》정가 7000원짜리와 문고판 등 10권을 골라 담았다. 책값 일만 원을 지불했다. 횡재한 기분이다.
 헌책방은 단순히 책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다. 추억어린 정신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법정스님이 열반한 후 스님의 대표작《무소유》70년대 최초 문고판 1000원짜리가 경매시장에서 10만원을 호가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우리는 헌책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족보조차도 헌책방에 내놓는 무지함을 깨우쳐야 한다. 자기 선조가 남긴 엽서 한 장, 어린 자녀들의 성장 기록물들을 소중이 여길 줄 아는 고급문화 의식이 선진사회로 가는 길이다. 전주는 사고와 헌책방이 살아 있어 행복한 문화도시다.   

은 종 삼/수필가ㆍ전 마령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