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물을 구분하던 동심의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나는 사계절 중 가을을 제일 사랑한다. 허공에서 춤추는 백설의 환희 속에서도, 생명의 소리가 지펴 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도 나는 가을을 기다려 왔다. 무더위에 산과 바다가 춤추고, 풀벌레들이 우는 신록의 가락 속에서도 가을 향을 자아내는 들국화가 그리워서였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왠지 센티해지고, 정주며, 미소 짓는 친근감으로 허무감을 달래주는 들국화는 내 마음의 꽃이었다.
  가을은 애수의 서정으로 온 산야를 오색찬란하게 채색해 준다. 설레이는 마음은 허공을 향해서 외치고 싶고, 들뜬 충동감은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창공에서 부서지는 파란 유리알 가루가 이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가을은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길 닫는 곳마다 산들바람에 한들거리는 들국화가 있기에 가을은 더 없이 아름답다. 들국화는 검소함과 강인함으로 서민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는 소박한 진리의 꽃이다.
  들국화는 여느 꽃과 달리 노란 새싹이 봄날을 들치는 순간부터 역경의 삶은 시작된다. 잘 조경된 기름진 옥토의 화단도 아니다. 그렇다고 귀족들의 사랑받는 고가 화분도 아니다. 메말라 각박한 땅 잡초 사이에서 뿌리 내려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야생화다. 
  들국화는 기발한 삶의 지혜를 발휘한다. 자신의 삶을 위해 잎은 말려 떨구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고의 덫을 헤이지 못하고 쉽게 삶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질긴 생명력을 몸소 가르쳐주는 꽃이다. 들국화에 대한 애환의 아름다움과 강인한 생명력을 이렇게 노래하고 싶다.
  서녘 빛에 묻힌 가을 들녘/무너져가는 잡초에 앉아/서녘이슬 꽃잎에 물은 들국화/너의 그윽한 가을향기가/금빛 평야에서 넘실대고 있다./ 밟히면 밟힐수록 더 강해지는/고래심줄 같은 너의 줄기/ 꺾이면 꺾일수록/더 많은 가지 잉태하여/ 다발 꽃 진통하는/너에 강한 생명력은/삶의 나약한 자들의 교본이다./그래서 나는/서릿발에 미소하는/ 잡초 군락속의 진주/ 보랏빛 들국화/내 너를 사랑 한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예찬 받아 온 들국화는 우리 땅 곳곳에 분포되어 자생하는 들꽃이다. 일찍이 선인들의 화폭의 가을 모델이 되어왔다. 가을바람에 미소 짓는 율동으로 선비들의 시조와 노랫말이 되어주기도 했다. 가을 애수 안겨주었던 들국화는 지금도 예술인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독특한 가을 향기는 문인들의 펜 끝을 움직이게 하며 가을을 노래해 준다. 6·25전쟁의 상흔이  있는 나의 유년시절의 가을날에는 내 손곱친구이었다. 사춘기 학창시절에는 싹트는 순정의 고귀한 사랑선물이었던 우리의 가을 들국화였다.
  싸늘한 바람 스치는 들녘에 다 시들어 가는 풀언덕에 누워 유리알 같이 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을 때다. 석양빛에 물들어 하늘거리는 들국화가 흘려주는 가을 낭만의 애수와 함께하고 있노라면, 가을걷이에 지친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려진다. 들꽃 치고 아름답지 않고 고귀하지 않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많은 들꽃들이 서리바람에는 가차 없이 무너지지만 홀로 외로운 고독 씹으며 가을을 끝까지 지켜주는 꽃이 보랏빛 진주 들국화다.
  오늘에 와서 주변 곳곳은 나날이 급변하는 외래꽃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잠식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여기에는 외래의 잘못된 인식이 뿌리 내려가고 있음이다. 우리 꽃을 멸시하는 조경 판을 바꾸어 유아부터 우리 것의 고귀함을 인식시켜주고 함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로가에 피어있는 이름도 뜻도 모르는 외래 꽃을 퇴치시켜야 한다. 그 자리에는 민족의 정서가 흐르고 만인의 사랑으로 애환에 담겨있는, 우리의 꽃이 피어있어야 한다. 향수어린 들국화와 코스모스다가 함께 어우러져, 가을바람 붙잡고 미소 던지는 환상의 도로 길이 되어야 한다. 들국화가 반겨주면서 가을의 낭만을 흘려주는 그날의 도로를 상상해 본다. 설렘으로 흥분되어 있는 내 마음이 환상의 길을 하염없이 달리고 있다.
  아! 벌써 가을이다. 들국화가 만발한 들길을 걷고 싶다.

백 승 록 /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