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추풍낙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쓸쓸한 상념(想念)에 잠겨지고 비애(悲哀)의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기도 한다.

  추야장장(秋夜長長) 긴긴 가을밤 섬돌 밑에서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인생의 무상(無常)함이 새삼스레 느껴지고 이름모를 고독감 마저 엄습해 온다.

  아무리 낙천적으로 세상을 사는 여유만만한 사람이라도 낙옆지는 소리와 함께앙상한 나무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울적한 마음이 들고 허전해 지기 마련이다.

  조락(凋落)의 계절이라지만 가을은 옛부터 말도 살찐다고 하는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다.  그런데 결실의 계절. 마음이 그 어느때 보다 풍성해 져야할 이 가을에 어찌 인간은 더욱 더 고독을 느끼게 될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갈수록 상막해 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문명의 지배속에서 자아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갈수록 기계화된 인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으니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지.

 들에서는 오곡백과가 무르읽어 황금이 파동치고 하늘은 프르게 부플어 희망이 솟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가을이 짙어가는 가운데 관광시즌을 타고 명승지를 찾아 산으로 들로 인파가 몰리고 있지만  그렇듯 떼 지어  다니는 단체 행동이 흥취가 있는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언필칭(言必稱) 결실의 계절 이라지만 머지않아 눈보라 치는 겨울을 맞을 채비를 갖추어야 하는 서민들의 마음은 절박하고 초조하기만 하다. 노하천고도수제(露下天高稻穗齊)라지만 태풍어노상심제. 수해농부허탈감. 태풍과 수해를입은 농부들은 상심하여 눈물 짖는다는 뜻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루한 장마와 태풍과 폭우. 그리고 변덕스런 일기변화로 여러 농작물의 피해가 많은데다 고추값과 각종 양념값이 너무 많이올라 김장 준비를 걱정하는 주부들의 착잡한 표정을 대하면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기름지고 풍성해야 할 가을이 각종 고물가에 시달려야만 하는 계절이 되어 삭막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중국의 구양수(歐陽修)는 가을의 맑고 아름다운 경치를 각로청수(刻露淸水)라 읊은바 있지만 황국단풍 아래 추성(秋聲)을 들으며 소슬바람 따라 거니는 맛도 가을이 아니면 느껴 볼 수 없는 멋이리라.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황금빛 들녘을 거닐며 인생을 반추해 보고 삶의 가치를 음미해 보려는 마음의 여유라도 가져봐야 하겠다.



허성배/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