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동안 몸이 쇠약하고 정신마저 혼미(昏迷)하여 산장(山莊)에서 휴식을 취했는데도, 어제까지는 학생이란 확신한 신분이 있었지만 오늘은 무직자다. 누가 “뭐 하느냐?”고 물어볼까봐 두려워서 기린로를 따라 마냥 걸었다. 2월의 찬바람에 봄볕이 완연했지만 낯설게만 느껴졌다. 길가의 알림판에 모집광고마저도 몸마저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니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불러낼 수도 없어서 빈번하게 찾았던 대형서점으로 가서 눈길이 닿는 대로 책을 뽑았다. 20여권을 들고 계산대에 갔더니 점원은 “어느 서점에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어제 받은 마지막 용돈으로 지불하고 스페어인생(spare life)이 시작되었다. ‘스페어인생’이란 주변사람들이 긴급하게 필요할 때마다 거들어주는 인생이다. 막말로 ‘놈팡이’이고, 그럴싸한 말로 ‘자영업자’이며, 속마음으로는 ‘흔들리며 중심잡기’이다. 
  이렇게 스페어인생을 사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니, 한 편으로는 좋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우려되는 면이 있다. 지금도 일간지에 나온 구직단념자가 58만 명이라는 기사(記事)를 보고 있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고 정부의 발표와 민간 연구소의 통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구직단념자들을 가지고도 신문사뿐만 아니라, 정부, 민간 연구소까지 왈가왈부하는 대상들이다. 학창시절만큼의 세월을 보낸 사람으로서, 구직단념자들에게 이 한국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주변에는 ‘공무원 시험’을 공부한다는 졸업자들이 많다. 예전의 과거급제 시험도 아닌데 시험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수험생들이 집결하는 것을 보면, 능라도 경기장의 집단체조를 보는 것 같다. 국민으로서 알아야할, 통치를 받기위한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3년 공부는 기본이고 4년은 선택”이라는 말을 듣는다. 어떤 시험공부이든지 단지 합격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떨어진 경우에는 모든 것이 헛수고이다. 또한 고등고시도 아닌, 공무원 시험공부는 세상살이 어느 구석에도 응용할 수 없는 저급인생을 만드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의 사회적 역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불합격에 대한 후유증은 전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더구나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출발점의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이다. 온갖 가능성이 있고 무엇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시절에 좁은 우물 안에 자신들을 가두고 있는 것 같다.
  학교에서 생각한 바깥세상은 사기(詐欺)와 부정부패로 얼룩져있으며, 온갖 나쁜 사람들만이 득시글거리며, 보이는 것은 유흥이나 퇴폐업소의 간판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학교에서 생각한 것보다 더 깨끗하고, 더 올바르며, 더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선악(善惡)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 바깥은 순전히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둔다. 따라서 악랄(惡辣)하게 살아간다면 그런 인생을 감당해야 할 것이며, 선하고 배려하는 인생을 산다면 그만큼의 선과 배려를 받을 것이다. 잠깐 동안 나쁜 행실이 좋은 행실을 이기고 향락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 이 세상살이이다.
  ‘놈팡이’도 기본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놈팡이’에게도 경력이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고나와 ‘놈팡이 짓’을 하겠다고 덤벼들어도 경력에는 못 당해낸다.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하루에 8시간 근무는 철저히 지켜야 한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평생을 두고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을 하루에 8시간씩 해야 한다. 그것만이 구직단념자라는 비아냥거림을 웃으면서 들을 수 있다.                           

유봉관/시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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