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섬 앞에서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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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살았다. 소를 그리며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단란했던 가족을 추억하며 살았다. 그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한반도가 나라 잃은 설음에 신음하는데, 그는 그 식민 지배를 하는 제국(帝國)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유학을 갔다. 제국의 딸을 연인으로 삼아 제국이 망하는 해에 결혼을 했다. 남북이 갈려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는 징집(徵集)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가 입대를 했다면, 인민군이 되어 이 나라에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쪽으로 멀고 먼 길을 택했으며, 그에게는 자유로운 세상으로의 여정이자, 부인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적들이 육지의 끝에 닿지도 않았는데, 이 섶섬 앞까지 와서 두 아들과 네 식구가 한 평 남짓한 쪽방에서 살며 선착장을 내려다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원래부터 생활이란 없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아 끈에 묶어 말리고 파란 게를 잡아 노리개로 삼아서 놀 때, 그에게는 옛 영광의 잔해처럼 담배 연기가 있었다. 그림 그릴 물감은 없어도 담배를 피우고, 그 은박지를 송곳으로 새겨 가족들의 생활을 그렸다.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도 그는 선착장을 내려다보며, 부인나라를 그리워하고 고향의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갈 수 없는 처지에 육지의 전쟁 소식은 그칠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한 해의 세월 동안 이 소나무가 우거진 섶섬 앞에서 빈둥거렸다. 그래서 그는 그의 그림 속 식구들의 머리를 거꾸로 그렸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한 곤궁을 잃기 위해 머리를 뒤집어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원래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이라고 하지 않기만, 제국의 시대에 영화를 누린 그에게는 이 전쟁의 시기가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가난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슬픔이 극에 닿으면 기쁨이 되고 환희(歡喜)가 된다. 그의 그림에는 옛날의 영광과 현실의 궁핍이 극과 극을 달리기에, 그림들이 꽃을 피우듯 환하게 생기를 내고 있다. 뼈만 앙상한 소는 물론이고, 쓸모없게 보이는 은박지의 물고기조차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보는 사람들에게 안긴다. 그것은 화가에 대한 환상(幻想)이 한몫 했을지도 모른다. 이 주도(州島)의 이곳저곳은 그에 대한 풀포기 하나라도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보인다. 거리를 만들고, 주거지를 복원하고, 미술관을 열고 산책로까지 개설했으니,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것에 마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은 그에 대한 신화가 만연되어 있다. 40년의 평생 동안,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 중에, 그 전쟁을 피해 단지 1년도 안 되는 세월을 머물렀던 곳이다. 이런 식이라면, 그가 스치는 곳마다 전국에 걸쳐서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이 남한에서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더구나 부인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파란 게와 어린이’는 게를 통한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그리고,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은 미술관 옥상에나 올라가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주거지에서 날마다 보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림 속 선착장이 있으며, 두 그루의 팽나무도 환갑(還甲)의 세월을 더했으니 그만큼 더 다정하다. 산책로를 지나, ‘섶섬이 보이는 풍경’의 그림을 따라 해녀의 집까지 왔다. 젊은 아낙네가 담배 연기를 한바탕 풍기고 일어나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앞의 섬이 ‘섶섬’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상을 차리는 사람에게 “‘섶’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한문으로 나무를 세 개 쓴다.”는 것이다. 자리돔 젓갈에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참치 물회도 많이 남았는데 김치를 안주 삼아 민속주의 남은 잔을 비웠다.
/유봉관 시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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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원래부터 생활이란 없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아 끈에 묶어 말리고 파란 게를 잡아 노리개로 삼아서 놀 때, 그에게는 옛 영광의 잔해처럼 담배 연기가 있었다. 그림 그릴 물감은 없어도 담배를 피우고, 그 은박지를 송곳으로 새겨 가족들의 생활을 그렸다.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도 그는 선착장을 내려다보며, 부인나라를 그리워하고 고향의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갈 수 없는 처지에 육지의 전쟁 소식은 그칠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한 해의 세월 동안 이 소나무가 우거진 섶섬 앞에서 빈둥거렸다. 그래서 그는 그의 그림 속 식구들의 머리를 거꾸로 그렸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한 곤궁을 잃기 위해 머리를 뒤집어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원래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이라고 하지 않기만, 제국의 시대에 영화를 누린 그에게는 이 전쟁의 시기가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가난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슬픔이 극에 닿으면 기쁨이 되고 환희(歡喜)가 된다. 그의 그림에는 옛날의 영광과 현실의 궁핍이 극과 극을 달리기에, 그림들이 꽃을 피우듯 환하게 생기를 내고 있다. 뼈만 앙상한 소는 물론이고, 쓸모없게 보이는 은박지의 물고기조차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보는 사람들에게 안긴다. 그것은 화가에 대한 환상(幻想)이 한몫 했을지도 모른다. 이 주도(州島)의 이곳저곳은 그에 대한 풀포기 하나라도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보인다. 거리를 만들고, 주거지를 복원하고, 미술관을 열고 산책로까지 개설했으니,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것에 마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은 그에 대한 신화가 만연되어 있다. 40년의 평생 동안,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 중에, 그 전쟁을 피해 단지 1년도 안 되는 세월을 머물렀던 곳이다. 이런 식이라면, 그가 스치는 곳마다 전국에 걸쳐서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이 남한에서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더구나 부인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파란 게와 어린이’는 게를 통한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그리고,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은 미술관 옥상에나 올라가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주거지에서 날마다 보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림 속 선착장이 있으며, 두 그루의 팽나무도 환갑(還甲)의 세월을 더했으니 그만큼 더 다정하다. 산책로를 지나, ‘섶섬이 보이는 풍경’의 그림을 따라 해녀의 집까지 왔다. 젊은 아낙네가 담배 연기를 한바탕 풍기고 일어나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앞의 섬이 ‘섶섬’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상을 차리는 사람에게 “‘섶’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한문으로 나무를 세 개 쓴다.”는 것이다. 자리돔 젓갈에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참치 물회도 많이 남았는데 김치를 안주 삼아 민속주의 남은 잔을 비웠다.
/유봉관 시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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