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의 어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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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을 향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노약자석에 앉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한사코 그렇지만 시내버스는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풍경이다. 색색의 사람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런데 어느 정류소에서 배가 나온 뚱뚱하다 할 할머니가 손자처럼 보이는 서너 살 배기의 어린아이를 보듬고 올라탔으며, 운전석 뒤의 노약자석 근처에 닿으려는 순간, 어느 젊은이가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런데 앉으라는 할머니는 어린아이를 앉히고, 그 옆에 엉거주춤 앞뒤 의자 손잡이를 잡고 누구도 얼씬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호막으로 서있다. 뒤 의자에 앉아서 쳐다보는 난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할머니가 얄미워졌다. 같이 앉지 않은 것이 말이다. 우리 사회의 단적인 문제점을 하나 보는 것 같은 심정에 어지간한 슬픔으로 저만치 쳐다본다.
물론 자리를 양보한 젊은이는 엉거주춤 출입구 쪽으로 걸어오고, 누구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할머니는 뒤를 힐끗거리기도 한다. 지나친 자녀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거꾸로 물구나무서게 만든다. 자기 자식만 귀한 세상, 더 비약하자면 온갖 속세의 욕심을 끌어당겨 자기 손자에게까지 안락을 만들어 주고, 한참 기를 펴고 활동하려는 사람들을 어른이라는 행세로 묵살해 버리는 사회의 꼴이라니,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광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리를 양보해준 젊은이는 어린아이의 사탕을 여지없이 빼앗아버리고 말 것이다. 울든지 말든지 상관할 게 없다. 지난 시절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터미널은 징징거리는 확성기 소리로 시끄럽다. 지난 겨울에는 아침 저녁으로 시내를 돌며 장례행렬을 재연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이 작은 도시가 떠나갈듯이 떠들어 대더니, 지금은 터미널 구석에서 진을 치고 확성기를 틀어대고 있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이런 소음에 시달려왔지만, 어느 누구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이 없으며, 구석에 앉아 골수(骨髓)를 뽑아가며 일을 해야 하는 내겐 정말 고역이다. 버스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내겐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로마 병정처럼 대로를 점령하고 시위하는 모습에서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사람살이에서 문제라는 것은 좋을 때는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문제는 어려울 때 생긴다. 예전에는 소위 황금노선이라는 전주-익산 구간의 버스를 타려면, 두 대를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항상 버스보다도 많은 승객들이 기다리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노선에 러시아워에도 열 명이 넘지 않으며, 대부분 서너 명의 승객을 태우고 그 큰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월급을 안 주는 업주를 구속하라” “보조금을 횡령당하는 시청?도청은 문제를 해결하라” “아이들 학원 하나 제대로 못 보내는 기사들의 정당한 노동대가를 위해 노조로 똘똘 뭉치자.” 거기다 어느 단체들까지 관여하여 “버스운행을 빨리 정상화하라.” 각자의 주장만 시끄럽다. 좋은 일에는 사진 한 장이라도 같이 찍으려 애쓰지만 궂은 일, 표가 나지 않는 일에는 나 몰라라 하는 풍토다.
업주는 잘 될 때 번 것으로 다른 사업까지 확장해 놔서 유지하기도 벅차고, 노동자는 그동안 밤낮으로 일해서 그들의 배만 채워준 것이 억울하고, 공익이라는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불했는데 승객이 줄어들어 생색나지 않는 관공서는 속은 것 같고, 일 년에 한 번도 버스를 타지 않는 주민은 시끄럽기만 하고, 우리네 말없는 국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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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리를 양보한 젊은이는 엉거주춤 출입구 쪽으로 걸어오고, 누구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할머니는 뒤를 힐끗거리기도 한다. 지나친 자녀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거꾸로 물구나무서게 만든다. 자기 자식만 귀한 세상, 더 비약하자면 온갖 속세의 욕심을 끌어당겨 자기 손자에게까지 안락을 만들어 주고, 한참 기를 펴고 활동하려는 사람들을 어른이라는 행세로 묵살해 버리는 사회의 꼴이라니,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광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리를 양보해준 젊은이는 어린아이의 사탕을 여지없이 빼앗아버리고 말 것이다. 울든지 말든지 상관할 게 없다. 지난 시절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터미널은 징징거리는 확성기 소리로 시끄럽다. 지난 겨울에는 아침 저녁으로 시내를 돌며 장례행렬을 재연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이 작은 도시가 떠나갈듯이 떠들어 대더니, 지금은 터미널 구석에서 진을 치고 확성기를 틀어대고 있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이런 소음에 시달려왔지만, 어느 누구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이 없으며, 구석에 앉아 골수(骨髓)를 뽑아가며 일을 해야 하는 내겐 정말 고역이다. 버스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내겐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로마 병정처럼 대로를 점령하고 시위하는 모습에서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사람살이에서 문제라는 것은 좋을 때는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문제는 어려울 때 생긴다. 예전에는 소위 황금노선이라는 전주-익산 구간의 버스를 타려면, 두 대를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항상 버스보다도 많은 승객들이 기다리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노선에 러시아워에도 열 명이 넘지 않으며, 대부분 서너 명의 승객을 태우고 그 큰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월급을 안 주는 업주를 구속하라” “보조금을 횡령당하는 시청?도청은 문제를 해결하라” “아이들 학원 하나 제대로 못 보내는 기사들의 정당한 노동대가를 위해 노조로 똘똘 뭉치자.” 거기다 어느 단체들까지 관여하여 “버스운행을 빨리 정상화하라.” 각자의 주장만 시끄럽다. 좋은 일에는 사진 한 장이라도 같이 찍으려 애쓰지만 궂은 일, 표가 나지 않는 일에는 나 몰라라 하는 풍토다.
업주는 잘 될 때 번 것으로 다른 사업까지 확장해 놔서 유지하기도 벅차고, 노동자는 그동안 밤낮으로 일해서 그들의 배만 채워준 것이 억울하고, 공익이라는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불했는데 승객이 줄어들어 생색나지 않는 관공서는 속은 것 같고, 일 년에 한 번도 버스를 타지 않는 주민은 시끄럽기만 하고, 우리네 말없는 국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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