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규(淸規)와 누규(陋規)라는 말이 있다.
청규란 부모에게 효도하라, 형제간에 의좋게 지내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 등의 일반인들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을 가르킨다.
반면에 누규란 일종의 다크 사이드(dark side)의 행동지침으로 깡패에게는 깡패로서의 의리, 도둑에게는 도둑으로서의 규칙 등 어둠세계 나름대로 최소한의 규칙이나 행동지침을 뜻한다. 즉, 싸움을 하되 패하면 절대 승복하고 뒤통수치지 않으며, 도둑질을 하되 가난한 자는 피하고 인명만은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는 행동규범을 말한다.
바로 이 청규와 누규가 한·중·일 등 동양권 전통사회의 사회적 규범이었다. 청규와 누규가 바로 설 때 사회가 지탱됐다.
물론 다크 사이드가 없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사회이겠지만 그런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선악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의 속성 때문이다. 어쨌든 청규만 가지고는 사회를 조금도 지탱시킬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누규를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포괄한 선인들의 예지가 놀랍다. 특히 청규와 누규 모두 그 바탕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가 깔려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지 선인들은 사회를 진단할 때, 청규와 누규를 함께 고찰했다. 이 때, 청규도 청규러니와 누규가 무너지면 사회붕괴의 조짐으로 보았고, 실제로 청규와 누규의 붕괴는 그대로 사회붕괴로 이어졌다. 동양권의 숱한 정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는 어떤가. 청규도 누규도 다 무너져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전통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시대를 거쳐 지식·정보화사회로 급속히 진행되면서 기존 가치체계의 재정립이 미처 이뤄지지 못한 탓도 있고, 또 현대사회에서는 기존의 전통의식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사회의 청규 쪽이 됐건 누규 쪽이 됐건 모두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를 저버린 현상만은 부인키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우선 청규가 요구되는 쪽을 보더라도 고위 및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일부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물질만능의 가치관과 쾌락주의에 사로잡혀 그저 돈만 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웃에 대한 배반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모·형제·자식까지 버리는 것은 예사고, 여기저기서 밤낮없이 불륜과 환락으로 육욕을 불태우고 있다.
누규 쪽이라고 해서 다를 게 조금도 없다. 깡패사회는 이미 조직화돼 예전에 흔히 말하던 ‘의리’라는 게 없어진 지 오래다. 순수한 ‘주먹만의 낭만’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엄청난 ‘이권’과 횟칼, 야구 방망이 등 인명살상의 흉기가 대신했다. 도둑도 더 이상 부자나 빈자를 가리지 않으며 툭하면 강도로 변해 사람 해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게끔 변했다. 기본적으로 ‘약자를 건들지 않는다’는 규율이 사라졌다. 한 마디로 누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얘기다.
이렇게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물질이면 인간의 영혼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천박 자본주의 탓이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갈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 천박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청규 누규는 한낱 옛 구호로만 머물 터.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이제는 우리자신이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아주 깊게 살피고 헤아려서 그야말로 청규 누규가 살아 숨쉬는, 그래서 살 맛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재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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