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의 보라꽃이 시들고, 이팝나무의 흰꽃이 시들고, 아까시나무의 흰꽃이 시들었다. 5월 하순의 끝자락은 감각을 추스르기가 힘든 때이다. 아침나절에 아파트 단지의 소공원에서 쉬고 있으려니 때죽나무의 흰꽃마저도 칙칙한 모습이다. 그 옆에서 산딸나무만 머리에 리본 같은 십자 모양의 하얀 꽃받침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봄에게 석별의 말도 주지 못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산딸나무 아래쪽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던진다. 울타리용 작은 나무의 흰점들이 웃고 있다. 벤치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쥐똥나무들이다. 가지와 잎에 연초록이 남아 있건만 전성기 잔치를 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듯 좁쌀만한 꽃망울들을 내밀고 있다. 꿀벌들이 대여섯 마리 날아와 잉잉거린다. 나는 꿀벌이 비키기를 기다렸다가 쥐똥나무의 꽃가지를 붙잡고 코에 가까이 대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해본다.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하는 몸인데도 향기가 느껴진다. 내가 건강한 몸이라면 진동하는 향기에 큰 기쁨을 느꼈으리라.
그런데 쥐똥나무들과의 교제가 고맙기는 하나 오래 지속할 수는 없겠다. 겨우 십분 정도 서 있었건만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흐른다.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와 목덜미를 닦으며 뒤돌아선다. 아까보다 더 짙은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긴다. 벤치 쪽보다는 정자 쪽이 훨씬 편하다. 기온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제 그늘도 그늘 나름이다.
문득 바다가 그립다. 그래도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거나 해수욕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으리라. 지참한 오늘 치의 신문을 읽어본다. 1면을 넘기니 2면에 특이한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설명을 읽어보니 세계 최대 규모의 태양광 보트 ‘튀라노 플래닛 솔라’ 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 항에 입항하는 장면이다.
항구 전체를 조망한 사진이 아니고 위쪽에서 보트만 크게 클로즈업 한 사진이라서 실감이 덜하다. 그래도 그 요트에 승선한 일행의 기분을 알 것 같다. 그들의 입장이 돼서 오랜 항해를 상상해보면 시원한 감각이 장쾌하다. 그들은 지금 세계 일주 중이다. 지난 해 9월에 모나코를 출발했다고 하니 지중해의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대서양을 항해한 것이 분명하다. 기사가 난 게 없으므로 그들이 파나마 운하를 통했는지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았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그래도 지상낙원이라는 남태평양의 섬들을 경유했을 것이니 그들은 보통 행운아들이 아니다.

/이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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