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봉] 平等 (평등)
평등을 통한 이상향을 강조한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결과의 평등’에 대한 과신 탓이다. 물론 인간이 보다 완벽하고 철저히 이성적이라면 ‘결과의 평등’ 구현만으로도 얼마든지 이상향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행인 지 불행인 지 몰라도 매우 불완전하며, 철저히 이성적이지도 못하며, 더 없이 기회적이며 가변적이다. 보다 완벽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보면 인간 자체가 한 마디로 ‘실패작’인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한 ‘결과의 평등’이 성공할 리 없것만, 인류는 그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평등구현’이라는 가치 추구에 대한 열망을 존속케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나름대로의 큰 의미를 지닌다.
사회주의가 있었기에 맹점 투성이인 자본주의에도 평등개념이 섞일 수 있었다. 원래 자본주의는 평등 관점에서 볼 때, 탐욕스런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 불평등 개념이다. 어디까지나 철저한 강자 논리이며, 약육강식의 세계, 그 자체다. 평등과 관련해 뭔가 정당성 확보를 위해 궁리 끝에 도입된 게 소위 ‘기회의 평등’이다. 자본주의의 장점인 효율과 비평등의 맹점을 보완한, 소위 ‘제3의 길’에서의 평등 개념이 바로 ‘기회의 평등’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개념인 이 기회의 평등은 인종, 성별, 지역, 종교, 학력,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줘야 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출발선을 똑같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그럴싸한 개념이자 구호다. 그러나 국가경제발전과의 상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제도상의 미비점과 기득권층의 반발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간과된 개념이다.
그런가 하면, ‘기회의 평등’을 조금 현실적으로 발전시킨 ‘조건의 평등’이라는 게 있다. 현 체제나 질서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기회, 일테면 노동, 문화향유, 의료혜택 등 각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소외된 계층에게 국가나 사회가 동등한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개념으로 서유럽 국가들이나 캐나다 등이 도입하고 있으나 재원충당 계층의 상대적 불만이 너무 커 문제점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지난 날, 김대중 정부도 집권 초기 때 이를 도입하는 듯했지만 능력과 효율중시의 신자유주의체제로부터의 강력한 견제와 자체 내부 관료들의 타성과 기득권층의 간단없는 반발로 이를 접어야 했던 것이나, 후보 시절에 사회적 약자를 깊게 헤아리면서 평등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정작 집권해서는 출자총액제한 완화, 과거 분식회계 해법기회 연장 지시 등 재벌개혁 후퇴 양상 등을 보이는 데서도 알 수 있 듯이 평등실현이 그렇게 말 처럼 쉬운 게 아니다. 상대가 있는 한, 강제하는 평등은 늘 부작용이 따른다.
그렇다고 또 포기할 수 없는 게 바로 평등이다. 평등이야말로 민주사회의 버팀목이자 인류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도 가끔은 평등을 주장하지만 성장 추구에 몰두하다 보니 불평등에 너무 쉽게 묻힌다. 이러다 다 잃는 것 아닌 지모르겠다.
/서재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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